Hanbange 3.0 - (C) Breadu Soft 2008

쇼아
내가 영영 끊기지 않을 이름을 줄 것이라
(이사야 56장 5절)

 

프란츠 슈호멜
전 SS 하사관

 

"용감하고 활기차게

 

앞을 내다보면서

 

이제 우리 모두
일하러가자

 

트레블링카는
우리의 소중한 일터

 

그 길로 나아가자

 

트레블링카와 우리는

 

바로 하나다

 

오직 소장님 명령에 따라

 

복종하고
임무를 다하자

 

봉사하고 봉사하자

 

충성 또 충성
만세!"

 

한번 더
크게요

 

누구나 비웃지만
슬픈 이야기에요

 

비웃지 않았습니다

 

내게 골내지 말아요

 

그 때 일을 알고 싶다해서
알려드리는 겁니다

 

프란츠가 가사를 썼어요

 

부헨발트에서
따온 곡에 맞춰

 

프란츠는 부헨발트 수용소
경비였어요

 

아침에 새로
도착한 유대인들은...

 

유대 잡역부들이요?

 

아침에 노래를 배워서

 

저녁이면
다 부를 수 있어야 했어요

 

다시 한번 불러주세요

 

그러지요

 

중요한 거니까
크게

 

"용감하고 활기차게

 

앞을 내다보면서

 

이제 우리 모두
일하러 가자

 

트레블링카는
우리의 소중한 일터

 

그 길로 나아가자

 

트레블링카와 우리는

 

바로 하나다

 

오직 소장님 명령에 따라

 

복종하고
임무를 다하자

 

봉사하고 봉사하자

 

충성 또 충성
만세!"

 

이제 됐나요?

 

묘한 게,이젠 이 노래를
아는 유대인이 없어요

 

트레블링카가
최고조에 달한 날

 

처분한 인원이...

 

1만8천이라던데...

 

너무 높이 잡았군요

 

법정 기록에서
확인한 숫자인데요?

 

그랬군요

 

1만 8천명을
처분했다...

 

제거한 겁니다

 

란쯔만 씨
그건 과장이에요

 

내 말을 믿어요

 

얼마쯤이요?

 

1만 2천에서
1만 5천

 

단 한밤중까지
한다고 칠 때

 

1월에는 첫 기차가
새벽 6시에 도착했어요

 

늘 새벽 6시에?

 

늘은 아니고 대개

 

 

사정이 바뀔 수도 있고

 

 

어떨 땐 새벽 6시
아니면 정오

 

그것도 아니면 저녁 늦게
네?

 

자,기차가 도착했다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요

 

전 과정을

 

전성기 동안의

 

말키나아 역을 떠난
수송열차가

 

트레블링카 역에 도착해요

 

말키니아에서 트레블링카까지
어느 정도 거리입니까?

 

한 10킬로미터 정도

 

트레블링카는 마을이었어요

 

작은 마을

 

역은 유대인 수송에

 

중요한 역활을 담당했어요

 

수송열차는 30-50량을
달고 있었어요

 

그 차량들을 10-12량

 

또는 15량으로 나누고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난
선로로

 

경사로까지 몰고 왔어요

 

다른 차량들은
사람들을 태운 채

 

트레블링카 역에서
대기했어요

 

창을 철조망으로 막아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했어요

 

열차 지붕에는
'저승사자'라는

 

우크라이나인이나
라트비아인들이 지켰고

 

라트비아인들이 악독했지

 

경사로에는
각 차량마다

 

청색대 소속의
두 유대인이 나와서

 

작업을 거들었어요

 

"내려,내려
빨리,빨리!" 하면서

 

우크라이나 경비병이나
독일인들도 합세하고

 

독일인들은 얼마나?

 

3-5 명

 

더는 아니고?

 

더는 아니에요
확실해요

 

우크라이나인들은
얼마나요?

 

10명

 

우크라이나인 10명
독일인 5명에...

 

청색대에서 나온
인원 20여명...

 

청색대 인원들은
여기와

 

여기서 사람들을
안으로 보냈어요

 

적색대는 여기

 

여기도 적색대

 

그 적색대라는 게...
무슨 일을 했습니까?

 

적색대는
옷가지들을 수거했어요

 

여기 남자 옷들

 

여기 여자 옷들을

 

곧바로 이리로 날랐어요

 

경사로에 사람들이 내리고

 

옷 벗는데까지
얼마나 걸렸습니까?

 

여자들은

 

1시간 정도 걸렸을까...

 

1시간이나 1시간 반

 

차량 다 해서
2시간쯤 걸렸어요

 

 

2시간이면...
다 끝났어요

 

열차가 와서

 

죽는 데까지

 

2시간이요?

 

2시간,2시간 반
3시간

 

전 차량에?

 

네,전 차량에

 

그냥 10차량의 인원이면
얼마나요?

 

그건 가늠 못하겠군요

 

사람들이 잇달아
한 무리로

 

계속해서
밀려들어 왔으니까요

 

대개 남자들은 여기나
여기서 대기하다가

 

바로 '통(tube)'으로
보내졌어요

 

여자들은 마지막으로

 

맨 끝에

 

이리로 올라가서
여기서 대기했어요

 

한 번에 약...

 

50-60명의 여자들이
아이들과 함께

 

자리 나기를 기다렸어요
여기의

 

벗은 채?

 

벗은 채
여름이나 겨울이나

 

겨울,트레블링카의 겨울은
아주 추운데

 

크리스마스 뒤의
1월엔 정말 춥지요

 

뭐 크리스마스 전에도
춥긴 하지만

 

영하 10-20도 사이로

 

처음엔 우리도
아주 떨었어요

 

방한복도 지급 안 해줬고

 

참 추웠어요

 

그래도 그 사람들에 비하면...

 

그 가엾은 이들이
더했지요

 

'통'

 

'통' 안은
정말 추웠어요

 

저기...

 

이 '통'을 좀 설명해주시죠
그 모습을...

 

어느 정도 넓이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어땠는 지

 

폭이 한 4미터 되고...

 

이 방 넓이에요

 

양 쪽으로 이 정도의
방벽이 있고...

 

벽이요?

 

아니,철조망

 

철조망을 소나무 가지에

 

꽁꽁 엮어 놓았어요

 

아시겠어요?

 

'위장망'이라고 했는데

 

20명의 유대인
위장대가 있었서

 

매일 새 가지들을
구해 왔어요

 

숲에서요?

 

네,숲에서

 

시야를 차단 시킨거지...

 

좌우로
아무 것도 안 보여요

 

하나도

 

틈이 없어요

 

못 보는군요

 

여기,여기

 

여기도,여기도

 

내다볼 수가 없었어요

 

트레블링카
그 대량학살이 있은 곳 치곤

 

크지는 않지요?

 

크진 않았어요

 

전장 500미터 정도였으니

 

직사각형이 아니라
마름모 꼴이었어요

 

보면은 여기는
땅이 평평하고

 

여기서부터 솟았어요

 

경사 꼭대기에
가스실이 있었어요

 

오르막 길이었지요

 

그 '통'을
'저승길'이라고 했다면서요?

 

유대인들은
'승천길'이라 했어요...

 

'마지막 길'이라거나

 

그 두가지 이름만
들어봤어요

 

어디 볼까요

 

일단 '통'으로 들어선다

 

그 다음은요?
벗은 채로?

 

다 벗은 채로
여기에

 

우크라이나 경비
둘이 서있어요

 

 

남자들의 경우...

 

안 들어가려고 하면

 

채찍으로

 

매질을 해요
여기와 여기서도

 

아,네

 

남자들은 몰아 넣었어요
여자들은 아니고

 

여자들은 아니라구요?

 

네,매질하지 않았어요

 

왜 선심을 베풀었죠?

 

나야 모르지요

 

모르지 뭐
매질을 당했을 지도

 

그랬을테죠

 

어쨌든 곧 죽을 건데

 

왜 아니겠어요

 

가스실 입구에서는...
그랬겠지요

 

아브라함 봄바(이스라엘)

 

아브라함
어떻게 된 건지 말해봐요

어떻게 발탁 됐습니까?

 

명령이 있었어요

 

독일인들로부터...

 

이발사들을 고르라구요

어떤 일에 필요하다면서

그 때만 해도
무슨 일인지는 모르고

 

할 수 있는대로
이발사들을 모았어요

 

그게 트레블링카에 간지
얼마쯤 뒤에...

트레블링카에 도착한 지
한 4주 뒤일 거에요

 

언제 그랬습니까?
오전이든가...

아침이었어요
한 10시쯤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수송된

여자들을 가스실로
보내는데

 

거기서 일할 사람을
뽑는다고 하면서

누가 이발 일을
해봤는 지 묻더군요

 

저도 이발사 경력이
꽤 됐었어요

 

누가 날 알아봤어요
같은 쳉스트호바 출신이던가 딴 데였겠지

 

그래서 자연히
저를 뽑고

또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을 더 뽑아서

 

그렇게 모였어요

- 전문 이발사들이요?
- 네,그래요

모여서
지시를 기다렸어요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독일인들과 같이

우리를
가스실로 데려갔어요

트레블링카
제2 수용소였어요

 

- 제1 수용소에서 멀었습니까?
- 그리 멀지는 않고

문까지 가는 길을
온통 철조망과 나무로 씌워놨어요

누가 봐도
문이 있는 지 모르고

가스실로 통하는
입구인지도 몰랐지요

독일인들은 그걸
'통'이라고 했다면서요?

 

아니요,그 작자들은
'천당 가는 길'이라던데요

 

- 저승길(himmelweg)?
- 네,'천당 가는 길'

 

우리는 오랫 동안 해오던대로
가스실 앞에 자리를 마련했어요

 

입구에 여자들이
앉을 수 있게

 

벤치를 몇 개
들여놨어요

 

이게 마지막이라거나

이젠 살아 숨쉴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

비통하다던가

하는 생각이
안들도록 했어요

 

가스실 안의 이발사로
얼마나 일했습니까?

이런 일은
오래 못가는 법인데

일주일에서 10일쯤
가스실 안에서 일했어요

 

그 뒤에는

잘린 머리칼들을
탈의 막사로 옮기도록 했어요

 

가스실은 얼마만했습니까?

그리 크진 않았어요
크기는 대략...12x12 미터 정도

 

하지만 그 안에

 

여자들을
많이 밀어 넣었어요

 

서로 깔고 앉을 정도로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처음 갔을 때는
뭘 할 지 몰랐어요

그 때 카포(작업반장)
하나가 와서 그러더군요

"이발사들이 할 일은

여자들이 그저
헤어컷을 하고

샤워를 한 다음

여기서 나갈 거라고
믿게 하는 거야"

하지만 그 방에서
나가게 될 일은 없었어요

그 방이 살아 숨쉬는
마지막 장소고

절대 살아서는
나갈 수 없었으니까요

 

좀 구체적으로
말해보세요

거기 있다보면
수송객들이 와요

대기해요

수송객들이 오면...

여기 와 닿으면...

 

여자들과 아이들을...

 

안에 밀어 넣어요

 

이발사들이
머리를 깎습니다

어떤 이들은...
다는 아니지만

이미 무슨 일인지
알고 있는 이들도 있었어요

 

우리는 가능한 한
최선을 다 했어요

- 아니, 그게 아니라...
- 인간의 도리로 할 일을

 

잠깐,여자들이 가스실에 오면
이미 가스실 안에 들어가셔서...

안에 들어가 있어요

말했잖아요
이미 가스실 안에 있다니까요

수송객들이 오기를
기다려야 하니까요

 

- 안에 있었다고요?
- 네,안에,이미 가스실 안에 있어요

그리고 갑자기 여자들이
들어오겠군요

 

- 네,들어와요
- 어땠습니까?

옷을 벗고
벌거숭이로

아무 것도 안 걸치고
들어와요

- 모두 다 벌거숭이로?
- 완전히 벌거숭이로

 

모든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 아이들도?
- 아이들도

탈의 막사를
통해 왔으니까요

가스실에 오기 전에
탈의실에서

옷을 다 벗기거든요

처음에 여자들이 다 벗은 모습을 보고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일단은 시키는대로
하자고 생각했어요

이발소에 오는
손님들을 맞는 듯이 하고

여자들한테
이발사의 일을 하는 거지요

머리는 최대한
짧게 자르게 했어요

여자들의 머리칼을
독일로 이송해 갔어요

그렇다면
박박 밀지는 않았군요?

 

네,밀지는 않았어요

 

그냥 좀 커트하는
기분이 들게 했어요

- 뭐로 했습니까,가위?
- 네,가위로

가위와 빗으로
기계는 안 썼어요

남자들 컷 하듯이요

 

빡빡 삭발하진 않았어요

그냥 머리 좀 자른다는
생각이 들게 했어요

거울도 있었습니까?

아니,거울은 없었어요

의자가 아닌 벤치를 놓고
16-17명의 이발사가 일을 했어요

인원이 많아서
한 사람 당 2분쯤

그 이상 걸리면 안됐어요
여자들이 계속 밀려들었으니까

 

해볼 수 있습니까?
어떤 식이었는 지

이렇게요
최대한 빠르게

거의 다들
직업 이발사들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여기와 여기를 잡고...

 

이렇게 그냥 잘랐어요

여기저기 자르고 나면
끝났어요

 

- 많이 움직이셨겠군요
- 그렇지요

일이 많았으니까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어요

 

밖에서 다음 차례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똑같이 했어요
같은 방식에,같은 과정으로

이발사 16명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면 한 차례에 몇 명이나
머리를 깎은 겁니까?

 

한 번 들어올 때마다
대충...

60-70명 정도
깎았을 거에요

한 자리에서
동시에

그 뒤엔
가스실 문이 닫기고...

그게 끝나면
또 한 무리가 들어와

총 140-150명쯤이 돼요

늘 그렇게
인원 수를 맞췄어요

그리고는 우리한테

가스실에서 좀
나가 있으라고 해요

한 5분 있으면

가스를 배출해
질식 시켰어요

- 어디서 기다렸습니까?
- 가스실 밖이요

다른 쪽으로 가서

거긴 여자들이 죽어 있고

작업반들이 대기하다가

시체를 꺼내는데
채 안 죽은 경우도 있어요

다 꺼내는 데

2분도 안 걸려요
1분이면 다 끝나요

다 치운 다음
다음 차례를 들여보내요

그러면 저희는
또 하던 일을 해요

여자들이
머리가 길었습니까?

대개는 그랬지만
짧은 이들도 있고

우리는 같은 식으로
머리 깎는 일을 했어요

말했듯이 독일인들이
머리칼을 따로 썼어요

 

아까 미처
답을 안 하셨는데

맨 처음 벌거벗은 여자들과
아이들을 보신 느낌 말입니다

어떤 심정 이셨습니까?

내 감정을
말하라는 건데

그런 데서 어떤 감정을
갖는다는 자체가 어려워요

종일 시체들 사이에서
일하다 보면

어느덧 감정이 사라져 버려요
감정이라고 말 할 것도 없어요

한가지 말씀 드리자면

가스실에서
제가 머리를 깎은 여자들 중에는

제 고향인 챙스코호바에서부터
온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낯익은
아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 아는 사람이요?
- 네,아는 사람들

같은 지역 사람

같은 동네 사람

몇몇은
친한 친구들이었어요

그 사람들은 저를 보자마자
붙들고 물었어요

"에이브,여기서 뭐하고 있어요?
이제 우린 어떻게 돼요?"

제가 뭐라고 말하겠어요?

 

무슨 말을 하겠어요?

고향의 이발사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의 부인과 여동생이...

 

가스실로 들어 왔어요...

 

자,에이브
계속 하세요

 

해야 합니다

 

못 하겠어요

- 너무 잔인해요
- 제발 좀

 

우리가
해야 할일입니다

 

차마 못 하겠어요

해야 합니다
힘들다는 거 압니다

 

죄송하다는 것도

 

이제 그만 합시다
부탁이에요

제발
계속 하세요

 

오늘은 정말 힘들군요

 

시신들을 자루에 담아 날랐어요
그게 독일식 운송방법이었어요

 

마치 쓰레기 치우듯이

 

독일인들은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취급했어요

 

좋아요
계속 하지요

 

친구가 아내와 여동생한테
뭐라고 대답 했습니까?

 

남편과 이야기 하고
싶어했어요

 

여동생도 그랬고

 

이게 생의 마지막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어요

뒤에 독일 나치 SS들이
지키고 서있었으니까

함부로
입을 열었다가는

아내와 여동생뿐 아니라

우리들까지
죽게 될 걸 알고서

 

그래도 서로한테
잘해주려고 애썼어요

단 1분 1초라도
더 같이 있으려고

그냥 안고
입맞추면서

다시는 서로 보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어요

 

챙스코호바

 

'통' 안에서
여자들은 기다렸어요

 

가스실 모터 소리를 듣고

 

사람들의 비명이나
애원 소리도 들었겠지요

 

기다리면서
공황이 엄습했어요

 

죽음의 공포에
넋이 나갔지요

 

열 앞 쪽에서
벗어나려 했어요

 

그러는 와중에

 

5-6 열의 여자들이
그 자리에서

 

배설을 했어요

 

선 채로요?

 

아니,쭈그려 앉거나
서서도

 

그 광경은 못 보고
...남긴 것만 봤어요

 

여자들만 그렇게...

 

남자들은 아니고
여자들만

 

남자들은 '통' 속으로
몰아댔지만,여자들은

 

대기했으니까

 

...가스실이 빌 때까지

 

남자들은?

 

남자들은
채찍질부터 했어요

 

아시겠어요?

 

남자들이
늘 먼저였군요?

 

네,늘 먼저였지요

 

기다릴 시간이
없었군요

 

없었지요
전혀 그럴 시간이

 

죽음의 공포로...

 

죽음의 공포로...

 

배설하는 거에요

 

잘 알려진 일이에요

 

임종의 자리에서도
곧잘 일어나요

 

제 어머니도
침대 곁에 쭈그리고서...

 

모친께서?

 

그래요
한참 배설 하셨어요

 

사실이에요
의학적으로...

 

입증 됐어요

 

그게 이래요

 

트레블링카로
오는 사람들은

 

바르샤바나 딴 데서
실릴 때

 

벌써 매질을 당했어요

 

트레블링카에서보다
더 심하게

 

틀림 없어요

 

그리곤 열차 찻간에서
먼 길을 서서 오는데

 

화장실도 없고
물도 못 마셔요

 

공포

 

다음엔 문이 열리고
또 매질이에요

 

"브렘제,브렘제,브렘제!"

 

아니면
"쉽체,쉽체..."

 

발음이 안 되는군요

 

틀니를 해서
폴란드어에요

 

'브렘제'나 '쉽체'

 

브렘제,브렘제 라면?

 

우크라이나 말로
"빨리,빨리"

 

다시 쫓기고...
채찍질 당하고

 

SS 쿠트너의 채찍은
이렇게 길었어요

 

여자들은 왼쪽
남자들은 오른쪽

 

계속 채찍질이에요

 

쉴 새 없이?

 

쉴 새 없이

 

들어가,벗어
빨리,빨리!

 

뛰어다녔겠군요?

 

줄곧 뛰어다녔지요

 

뛰고 비명 지르면서

 

그런 식으로
해치웠어요

 

그게 요령이었군요

 

요령이었지요

 

어떻게든
빨리 끝내야 했어요

 

청색대가 맡은
임무 중 하나는

 

노약자들을 이끌고...

 

'의무실'로
가는 것이었어요

 

가스실로의 흐름이
끊기지 않게

 

노인들은 뒤쳐지니까

 

의무실 배정은

 

독일인들이 결정하고

 

유대인 청색대는

 

이에 따르기만 했어요

 

저기서 앞장서거나

 

들것으로 날랐어요

 

나이든 여자들
병든 아이들

 

어머니가 병이 난
아이들이나

 

할머니가 아주 노쇠해서

 

부축하는 사람들까지

 

의무실로 보내졌어요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흰 깃발을 쫓아

 

길을 따라가

 

맨 끝에 닿아보면
아무 것도 없었어요

 

눈 앞에는
시체 구덩이뿐

 

옷을 벗게하고

 

모래언덕에 앉힌 다음

 

뒷통수에 총을 쐈어요

 

그리곤 구덩이에
밀어넣고

 

구덩이에는
늘 불을 피웠어요

 

잡동사니와 종이와
휘발유와 함께...

 

시체들이
활활 탔어요

 

라하르트 글라자르
(스위스 바젤)

 

'의무실'은
노인들을 손쉽게 데려가게

 

경사로 가까운 곳의

 

협소한 곳에
있었습니다

 

저도 그 일을
해야 했습니다

 

처형장은
은폐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지붕만 달린
공터였는데

 

울타리를 쳐놔서

 

안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곳에 이르는
좁은 통로는

 

아주 근거리로
가스실의 '통'과

 

좀 비슷했습니다

 

작은 미로 같았습니다

 

한 가운데에는
구덩이가 있고

 

입구 왼쪽으로

 

다이빙대 같은

 

나무 널빤지가 놓인

 

작은 칸막이가 있었는데

 

걸음을 못 옮기는
병약자들을

 

그 안에
앉혀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트레블링카식 용어로

 

명령이 떨어집니다

 

SS 하사관 미테의

 

"환자마다
약 1알씩 처방" 식의

 

뒷통수에 한 방입니다

 

한창 때는
일과처럼

 

벌어진 일입니다

 

그 무렵의 구덩이는

 

적어도 약

 

3-4미터 깊이로

 

시체가 가득 했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었는데

 

무슨 이유로
혼자 도착한 아이나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들 말입니다

 

이 아이들도
'의무실'로 데려와

 

총살 했습니다

 

'의무실'은
트레블링카의 노예인

 

저희들한테도

 

종착역이었습니다

 

가스실이 아니라

 

늘 '의무실'에서
끝을 봤습니다

 

현재의 아우슈비츠
조차장

 

늘 찻간에서 내려올 수 없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죠

 

수송 중에
죽은 사람

 

중병 환자

그 상황 아래서

심하게 얻어 맞아서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찻간 안에 남아 있었죠

 

가장 먼저 할 일은

찻간에 올라가서

그 시체나 반주검인 사람들을

독일인들이 말하는 '속보(Laufschritt)'로
옮기는 일이었죠

'뛴다'라는 뜻으로

뛰어야지
걸어서는 안됐어요

모든 일을 '속보'로 해야지

 

- '쾌속보'로
- 쾌속보로

루돌프 브르바
아우슈비츠 생존자

 

그야말로 스포츠 국가죠

우린 그 몸체들을
꺼내어

경사로에 있는
트럭으로 들고 뜁니다

경사로의 트럭까지

트럭은 미리
대기하고 있어요

대개 5-6댄데
더 될 때도 있고

대중 없죠

아무튼 첫 트럭에
시체나 사람들을 실어요

 

죽은 사람과 반쯤 죽은 사람을
의학적으로 구분하지 않아요

죽은 척 할 수도 있고

아무튼 그렇게 해서
트럭을 다 채우면

첫 트럭이
화장장으로 향합니다

경사로 왼쪽
약 2킬로 거리죠

- 당시니까 2킬로죠?
- 네,그 당시로

- 새 경사로를 짓기 전에
- 네,짓기 전에

 

예전 경사로였죠

 

구 경사로로
유대인 75만이 거쳐갔을 겁니다

구 경사로로

 

상당수죠

 

새 경사로는
헝가리의 백만 유대인을

초단시간에
살육하려고 지은 거죠

 

1944년 초에 지어진
새 경사로

 

이 기계적인
전 살인 공정은

단 하나의 원칙 아래
이뤄졌죠

사람들이 아우슈비츠에서의
운명이나 용도를 모르게

 

신참자들은 겁내는 기색 없이
가스실까지 걸어 갔어요

 

특히 여자나 어린애들의
공포심은 위험했어요

 

그래서 나치들이
중요하게 여긴 건

 

마지막 순간까지 공포심이 안 불거지게
우리 입을 막는 거였죠

 

누구든 신참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면

둘 다
차량 뒤로 끌고가

그 자리에서 총살했습니다

 

만일 공황 상황이 발생하면

경사로 현장에서
대학살극을 벌여야 하는데

이미 완성된
기계적 공정이 틀어지죠

 

다음 수송열차를
들여보낼 수도 없어요

경사로에 널린
시체와 피바다에

공황이 가중 되죠

 

나치들이 강조한 원칙은

아무 문제 없이
질서정연히 해내서

 

시간을 절약한다는
것이었어요

 

가스실 상황이
펼쳐지기 전에

 

SS에서는 보안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SS 요원들이
화장장을 에워쌌습니다

 

군견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다수의 SS 요원들이

 

뜰을 순찰 했습니다

 

왼쪽으로 난 계단이

 

지하의 '탈의실'로
통했습니다

 

비르케나우에는
화장장이 네 곳이었어요

 

제2,제3
그리고 제4,제5 화장장

 

제2,제3 화장장은
구조가 비슷했습니다

 

두 군데 다
탈의실과

 

가스실이 지하였습니다

 

대형 '탈의실'은

 

280 평방미터 정도의
넓이였습니다

 

대형 가스실에서는

 

한 차례에

 

3천명을 가스로
중독사 시켰습니다

 

제4 화장장과 제5 화장장은
제2,제3 화장장과는 다른 구조로

 

지하 시설이
아니었습니다

 

다 지상에 있었습니다

 

제4,제5에는
3개의 가스실이 있었는데

 

최대 수용력이

 

한 번에
1,800-2,000 명이었습니다

 

아우슈비츠 박물관
제2,제3 화장장 모델

 

승강기로 시신들을
소각로에 운반

 

제2,제3 화장장에는
소각로가 15기씩이었고

 

제4,제5 화장장은
8기씩

 

화장장에
도착한 사람들은

 

험상궂은 광경을

 

일제히 보게 됩니다

 

전 지역에
SS들이 깔려있고

 

짖어대는 군견과

 

무장한 기관총

 

주로 폴란드계 유대인인 이들은
의혹에 휩싸입니다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걸
깨닫습니다

 

하지만 설사 누군가
작은 낌새를 챘더라도

 

3-4시간 뒤에는
재로 변할 운명이었습니다

 

이윽고 '탈의실'에 닿아보니

 

거긴 마치

 

국제적인
관광안내소 같았습니다

 

탈의실 벽에는

 

옷걸이가 있고

 

옷걸이 마다
번호가 있고

 

옷걸이 밑에는

 

나무 벤치가 있었습니다

 

옷 벗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라는 겁니다

 

이 지하 '탈의실'을
떠받치고 있는

 

여러 기둥마다에는

 

각국어로 쓴

 

구호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청결 제일!"

 

"이 박멸!"

 

"목욕 엄수!"

 

"소독실 방향"

 

이 모든 구호들은

 

오로지 여기서

 

옷을 벗은 사람들을
가스실로 보내려는 책략이었습니다

 

이제
왼쪽 직각 방향이

 

가스실입니다

 

육중한 문이
달려 있습니다

 

제 3 화장장
탈의실

 

가스실

 

지클론을 제2,제3 화장장에서는
천장을 통해

 

이른바 'SS 소독대원'들이

 

쏟아 붓습니다

 

그리고 제4,제5 화장장에서는
측면 투입구로

 

가스 5-6통이면

 

2천명을
살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 '소독대원'들은

 

적십자 마크가 찍힌
트럭을 타고 와서

 

수송 되어온 사람들이

 

목욕하러

 

가는 거라고
믿게 합니다

 

하지만 적십자는
위장의 방편일뿐

 

실은 지클론 가스통과
따개 망치를 감추고 있습니다

 

이 가스로 살해하는데

 

약 10-15분이 걸립니다

 

가장 끔찍한 일은

 

가스실 문이
다시 열렸을 때의...

 

눈뜨고 못 볼
참상입니다

 

사람들이 현무암이나
벽돌처럼

 

켜켜히 쌓여 있었습니다

 

가스실에서 나오려는
그 몸부림

 

그 광경을
여러 번 봤습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결코 익숙해지지도 못했고

 

견딜 수가 없었어요

 

제4 화장장

 

견딜 수 없었군요

 

네,그게 일단
가스를 쏟아 넣으면

 

이렇게 됩니다

 

바닥에서
위로 솟아올라요

 

그 다음엔
심한 몸싸움이 벌어집니다

 

싸움이에요
살아 남으려는

 

가스실에
조명이 나가면

 

칠흑처럼 캄캄합니다

 

힘센 사람들은
위로 올라오려 합니다

 

아마 위쪽으로 갈수록

 

공기가 더 있다고

 

느끼는 겁니다

 

좀 더 숨을 쉬어보려고

 

그래서 몸싸움이 벌어집니다

 

둘째로 대개의 사람들은
문 쪽으로 밀려갑니다

 

심리적으로
문이 거기 있기에

 

그 쪽으로
달려드는 겁니다

 

본능적으로

 

사투가 벌어집니다

 

아이들과...
힘없는 사람들

 

노인들이 밑에
깔리기 마련입니다

 

힘센 자들은 맨 위에

 

이런 사투 속에서는

 

누가 밑에 깔렸는 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게 자기 아들이라도 말입니다
알 수 없어요

 

문이 열렸을 때는요?

 

쏟아집니다

 

사람들이
벽돌 무너지듯이

 

트럭에서
돌 떨어지듯이

 

하지만 지클론 가스 근처는
비어 있습니다

 

그 가스 결정체 주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텅 비어 있어요

 

아마 희생자들이
그곳에서 가스 기운이...

 

제일 세다는 걸
알기 때문이겠지요

 

사람들은
어땠습니까?

 

사람들은
뭉개져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서의

 

그 사투
몸부림치고 발버둥쳤기에

 

오물 범벅에

 

귀와 코의

 

출혈

 

또 종종 보면

 

맨 밑에 깔린
사람들은

 

위에서 짓누른 무게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골이 깨지고
부서지고

 

네...

 

어떤가요?

 

- 끔찍하군요
- 말해 뭐합니까

 

구토물

 

귀와 코에서
쏟아진 핏덩이

 

월경혈도 있었을 겁니다
분명히

 

그 모든 흔적들

 

살기 위한 안간 힘
차마 볼 수가 없었고

 

너무 처참했습니다

 

필립 뮐러
체코계 유대인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화장인부' 5인 중 1인

 

화장장 문턱을

 

넘은 사람들에게

 

사실을 말해주는 일은
무의미 했습니다

 

구해줄 수가 있어야지요

 

구출은 불가능 했습니다

 

1943년의 어느 날

 

제5 화장장에 와있는데

 

비아위스토크에서 온
열차가 도착했습니다

 

'화장인부' 중의 하나가

 

'탈의실'에서
친구의 아내인

 

한 여자와 마주쳤습니다

 

바로 가서
귓뜸 해줬어요

 

"다들 몰살 당한다

 

3시간 있으면
재가 되어버린다"고

 

여자는 아는 사람이라
그 말을 믿었습니다

 

얼른 달려가서

 

다른 여자들한테
그 말을 전했습니다

 

"다 죽게 될 거래요

 

독가스로 죽인요"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껴안으면서

 

귀를 막아
그 소리를 못 듣게 했습니다

 

여자가 미쳤다고 여기고

 

쫓아버렸고

 

여자는 남자들한테로
갔습니다

 

안 통했습니다

 

곧이 안 들었어요

 

비아위스토크나
그로드노 게토에서도

 

듣던 소문이었습니다

 

누가 그런 소리를
듣고 싶겠습니까!

 

아무도
귀를 안 기울이자

 

여자는
얼굴을 쥐어뜯었습니다

 

격심한 충격으로

 

여자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다 가스실로 가고
여자만 남겨졌습니다

 

우리는 소각로 앞에
도열했습니다

 

밀고하지 않는 여자에게

 

심한 고문이 가해졌습니다

 

결국엔
지목을 했고

 

당사자는 불려나가
산 채로 소각로에 던져졌습니다

 

이러더군요
"누구든 입을 놀리면 이렇게 된다"

 

우리 '특무대원'들 중에서도
방법만 있으면

 

사람들한테

 

알려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간의 경험으로
미뤄볼 때

 

여기서 사람들한테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마지막 가는 길만

 

더 힘들어질 뿐

 

그나마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 사람들은...

 

폴란드계 유대인들이나

 

테레지아 시(체코 가족수용소)에서
온 유대인들이었는데

 

벌써 빌케나우에서
6달이나 버티어서

 

알려주는 게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다른 경우를 보면

 

그리스나 헝가리
코르푸 섬에서 온 유대인들은

 

10-12일에
걸쳐 오면서

 

굶주리고

 

며칠 째
목마름에 견디다 못해

 

여기 왔을 땐
반 실성 상태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달리 취급 합니다

 

그냥 이 한마디

 

"옷을 벗고 나면
곧 차 한 잔을 줄 것이다"

 

너무 먼 길을 오면서

 

이 지경에
이른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오로지

 

목 축일
생각뿐이었습니다

 

SS 사형집행인들은
그 속내를 잘 알았습니다

 

다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요
사전에 계획된...

 

계산된
몰살 과정의 일부였어요

 

이 사람들은 탈진해서

 

물이야
주던 안 주던

 

그냥 가스실로
걸어들어가리라는 사실

 

사실

 

이 사람들은 이미

 

가스실로 가기 전에도
반주검 상태였습니다

 

아이들은 보면

 

엄마한테
울면서 보챕니다

 

"엄마,물 좀,물 좀!"

 

물 없이
몇 날을 보낸 어른들 또한

 

마찬가지
강박 상태라

 

뭘 알려줘봐야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코르푸 CORFU

 

- Grab it from there.
- Yes, grab it from there.

 

- Put it right there.
- Okay.

 

- Right there.
- Okay, yes.

 

Okay, be careful. Wait.

 

You'll come and pick it up later?
- Yes.

 

- Put it down.
- In a second.

 

Hold on a second.

 

Just hold on a second.

 

Maybe if you removed this?

 

Got it? That's how you'll load it.

 

Come and pick it up next week.

 

Understood?
Now move the cart away from here.

 

Move the cart.

 

Yes, let's make some space.

 

So you're an actor now.

 

Let's finish this.

 

모쉐 모르도

 

제 조카들이에요
비르케나우에서 타죽었어요

 

형의 두 아들애들

 

엄마와 함께
화장장에 끌려갔어요

 

모두 비르케나우에서
타죽었어요

 

형이고

 

아팠는데
화장장의 소각로에

 

집어넣고
태워 죽였어요

 

비르케나우에서

 

큰 아들애가 17살

 

둘째가 15살

 

애 엄마와
꼬마애들 둘이 더 있었어요

 

네,자식 넷을 잃었어요

 

부친께서도요?

 

아버지도

 

몇 세셨습니까?

 

아버지는
85살이셨어요

 

년로하셨지요

 

85세로 아우슈비츠에서
돌아가셨군요

 

아우슈비츠,네

 

85살에 비르케나우에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께서

 

먼 여행을 하셨군요

 

가족이 몰살 당했어요

 

가스실과 화장장에서

 

코르푸 거리

 

1944년 6월 9일
금요일 아침에

 

코르푸 유대 교민들이
겁에 질린 채

 

독일인들의

 

지시대로 모였어요

 

이 광장에 게쉬타포와
경찰들이 가득했어요

 

행진을 했는데

 

반역자인 아테네 유대인
카나티 형제들가지 끼였어요

 

그 형제들은
전후에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지만

 

벌써 풀려났지요

 

우리는 행진 명령을
받았어요

 

거리로요?

 

네,이 거리로

 

얼마나 모였습니까?

 

정확히 1,650명

 

상당한 인원이었군요?

 

꽤 됐지요
기독교도인들은 저기 섰고

 

네,기독교도들

 

기독교도들이
어디 있었다구요?

 

거리 모퉁이에?

 

네,발코니에도

 

우리가 앞장 서고

 

기관총을 든 게쉬타포들이
뒤를 따랐어요

 

그게 몇 시쯤입니까?

 

오전 6시

 

새벽이었어요

 

날은 맑았습니까?

 

네,맑았어요

 

새벽 6시에

 

1,600 명이 거리에...

 

다 모였어요

 

유대인들이 붙들려 간다고
기독교도들이 수근거렸어요

 

왜들 온 겁니까?

 

구경 하려고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지요

 

겁이 났습니까?

 

아주 겁났지요
젊은이들도 있고

 

병자들
어린 꼬마들

 

노인들
광인들까지

 

미친 사람이나
환자들까지 데려왔으니

 

교민 사회 전체가

 

풍지박산 나는 건
아닌지

 

아주 불안했어요

 

어떤 말을 들었습니까?

 

여기 모인 사람들이 다

 

독일로 일하러
갈 거라고 했어요

 

폴란드

 

폴란드
맞아

 

독일인들은
코르푸의 벽마다

 

명령문을 내붙였어요

 

모든 유대인들에게
알린다면서

 

우리를 모두 잡아들여
그리스에서

 

살지 못하게 한다는
내용이었어요

 

경찰서장과
당국자가 서명을 했어요

 

시장도 하고

 

유대인이 없는 게
낫다는 겁니까?

 

네,나중에
돌아와서 알았지

 

그렇지?

 

코르푸가
반유대적이었습니까?

 

늘 반유대적으로
나왔습니까?

 

분명 그렇긴 했지만
그 간에는

 

그렇게 험하지는 않았어요

 

어째서요?

 

그게 뭐...

 

자기들이 반유대주의자라고는
생각 안 했어요

 

알만도 아론
코르푸 유대 교민회장

 

지금은요?

 

지금은 자유로워요

 

지금 기독교인들과의 사이는...

 

좋아요,아주

 

무슨 이야깁니까?

 

뭘 묻는 건지 했어요

 

기독교도들과
우호적인데 동감이라고...

 

유대인들은 다
게토에 거주 했습니까?

 

네,대부분

 

유대인들이 떠난 뒤
어떻게 됐습니까?

 

우리 재산을 다 가져 갔어요
금이든 뭐든

 

집 열쇠를 가져가서
다 훔쳐 갔어요

 

누가 다 가져 갔습니까?
훔쳐간 게 누굽니까?

 

법적으로는
그리스 정부 귀속이지만

 

나라에서 가져간 건
아주 일부에요

 

나머지 사람들이
훔치고 갈취했어요

 

누가요?

 

다들...
독일인들까지

 

1,700여명이 추방되어...

 

122명만
살아 남았어요

 

95%가 죽었어요

 

코르푸에서 아우슈비츠까는
먼 길인데...

 

우리가 출발한 게
6월 9일인데

 

6월 29일에야
당도했어요

 

대다수가 29일 당일 밤에
불에 탔어요

 

6월 9일에서 29일까지
계속 된겁니까?

 

여기서 닷새쯤
머물렀어요

 

여기 막사에서

 

아무도 부모 형제들 곁을 떠날
엄두를 못 냈어요

 

우리는 종교적이고

 

가족적으로
유대를 나눠왔어요

 

제 1진이
6월 11일에 떠났고

 

저는 6월 15일
제 2진으로 츨발했어요

 

어떤 배를 타고 갔습니까?

 

자테라라는
거룻배요

통과 판자로 된

 

독일인들이 작은 배로
예인해 갔어요

 

배에는 경비가
두 서넛 있었고

 

독일인들이 많진 않았지만
다들 겁을 먹어서

 

공포가 스스로를
옭아맨거지요

 

여행은 어땠습니까?

끔찍했어요!
아주!

 

물도 음식도 없고

 

가축용 수송화차
90칸에 실렸어요

 

다 선 채로

 

많이들 죽었어요

 

그 시신들은 나중에
석회 실린 다른 칸으로 옮겼는데

 

역시 아우슈비츠에서
소각 됐어요

 

발터 슈티어
전 나치당원

 

전 제국철도
33과 과장

 

기차 구경을
안 하셨습니까?

 

네,못 했어요

 

너무 일이 많아
자리를 비우지 못했어요

 

쉴 새 없이 일했어요

 

“GE. D. O.B. ”

 

"GEDOB"의 뜻은...

 

"동부방면 교통 총국"

 

1940년 1월에 게돕
크라쿠프에 발령이 났어요

 

1943년 중반에
바르샤바로 옮겼고

 

수석 교통기획관이었어요

 

교통기획과 부서장

 

그래도 1943년 전후로
하는 일은 같았겠지요?

 

하나 달라진 거라면

 

부서 책임자로
승진한 거지요

 

전쟁 중
폴란드의 교통총국에서

 

구체적으로 하신 일은요?

 

그 일은
독일 국내와는

 

전혀 달랐어요

 

정규열차와 특별열차를
운행하는데

 

시간 편성을 조정했어요

 

여러 부서가 있었습니까?

 

 

33과에서 특별열차와
정규열차를

 

담당했어요

 

특별열차는
33과 소관이었이요

 

계속 특별열차
담당 부서에 계셨습니까?

 

 

특별열차와 정규열차의
차이는 뭡니까?

 

정규열차는
표만 구입하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어요

 

가령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까지

 

또는 크라쿠프에서
렘베르그까지

 

특별열차는...
인가를 받아야 해요

 

특별히
일단의 사람들한테...

 

단체요금을 받지요

 

지금도 특별열차가
다닙니까?

 

그럼요

 

예나 지금이나

 

단체 휴가에 특별열차를
신청할 수 있습니까?

 

네,가령
이주노동자들이

 

명절에 고향에 갈 때

 

특별열차를 편성해요

 

아니면 교통이
원활하지 못할테니

 

전후에
국빈을 위한 열차를

 

담당하셨다고 하셨는데

 

전후에,네

 

어떤 국왕이
독일을 방문할 때

 

특별열차를 이용합니까?

 

그렇지요,특별열차

 

하지만
그 절차는 같지 않지요

 

단체 여행 등을 위한

 

특별열차들과는

 

국빈은
외무부 관할이지요

 

네,다른 질문을
좀 하겠습니다

 

왜 전쟁 중에
그 전이나 후보다

 

특별열차 운행이
많았습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군요

 

말씀하시는 게

 

그 '재정착 열차'로군요

 

네,'재정착'

 

그렇게 불렀어요
그 열차들은

 

독일 운송부의

 

지시를 받았어요...
독일 운송부 장관의

 

운송부 장관의

 

허가가 필요 했어요

 

- 베를린의?
- 베를린의

 

그 건의

 

실행 부서는

 

동부방면 교통총국이었지만

 

베를린이 주무처였어요

 

네,그렇군요

 

- 아시겠어요?
- 알겠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그 '정착민'들이
대개 누구였는지...

 

아니!
우리는 몰랐어요

 

바르샤바에서
철수할 때에야 비로소

 

유대인들이나
범죄자 등등의

 

사람들이란 걸
알게 됐어요

 

유대인과
범죄자들이요?

 

범죄자 등등이요

 

범죄자 용 특별열차요?

 

아니
소문이 그랬다는 거에요

 

발설 못 할
이야기였어요

 

사는 게
고단해지지 않으려면

 

말 않는 게
상책이었어요

 

그래도 그 열차들이

 

트레블링카나
아우슈비츠로 간다는 건...

 

그야 알았지요

 

제 관할 지구였고

 

제 지시 없이는
목적지로 못 가니까

 

가령 에센에서
출발한 열차는

 

부퍼탈 지구를 거쳐

 

하노버,마그데부르그
베를린

 

오데르 프랑크푸르트
포센,바르샤바 등지로 갑니다

 

제 손을 거쳐서

 

트레블링카가 몰살을
뜻하는 걸 아셨는지...

 

그야 몰랐어요!

 

모르셨다구요?

 

나 참,몰랐어요!
어떻게 알겠어요?

 

트레블링카에
가 본 적도 없는데

 

크라쿠프나 바르샤바에서
일과 씨름했어요

 

사무적으로...

 

사무만 봤어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좀 놀랍군요

 

특별열차
담당부서에서

 

'최종 해결책'을
전혀 몰랐다니

 

그 때는 전시였어요

 

다른 분들은
알고 계시던데

 

같은 철도에 종사하던

 

열차 차장 분들이요

 

네,봐서 알았겠지요

 

하지만 무슨 일인지
저는 몰랐어요

 

트레블링카를 뭘로 아셨습니까?
트레블링카나 아우슈비츠...

 

네,트레블링카나
베우제츠 등등을

 

포로 수용소로 알았어요

 

장소

 

장소
그거에요

 

죽음은 아니고

 

아니요
사람들을 수용하는

 

가령 에센발 열차나

 

쾰른이나 딴 데서도
그쪽으로

 

열차가 운행 됐어요

 

전시고 연합군이
사방에서 쳐들어오는데

 

그 사람들을
수용해야 하지 않겠어요

 

언제 정확히 아셨습니까?

 

언제냐 하면...

 

소문이 돌았어요
쉬쉬하면서

 

입 밖에는 못내고
어림없지!

 

당장 끌려가는데!
소문이...

 

소문으로?

 

네,소문으로

 

전쟁 중에요?

 

종전 무렵에요

 

1942년에는 아니고?

 

아니요! 어림없지!
전혀요!

 

1944년 말쯤에요

 

1944년 말?

 

그 전엔 아니고?

 

소문이라면요?

 

그러더군요

 

수용소에 간 사람들이

 

건강을 해쳐서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몰살 시켰다는 소리에
깜짝 놀라셨습니까?

 

질겁했어요,네

 

전혀 모르셨고

 

전혀요
그 수용소가 이름이 뭐더라...

 

오펠른 지구였는데...
그래,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는
오펠른 지역이었지요

 

그래요
크라쿠프에서 멀지 않았어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마디도 못 들었어요

 

아우슈비츠에서 크라쿠프까지
64킬로미터고

 

네,멀지 않지요

 

아무 것도 몰랐어요
조금도

 

그래도 이건 아셨지요
나치가...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싫어한다는 건

 

네,다들 알았지요

 

책도 나왔고
비밀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몰살 시켰다는 건

 

금시초문이었어요

 

뭐 오늘날에도

 

부인하잖아요
어떻게 그 많은

 

유대인을 그럴 수 있느냐
그런가요? 모르겠군요

 

그런 말들을 해요

 

아무튼 그 때 일은
잔혹했어요

 

뭐가요?

 

학살이요

 

다들 비난해요
양식있는 사람이라면

 

하지만 그때는 몰랐어요

 

가령 폴란드인들은

 

폴란드 사람들은
그 일을 다 알았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니지요

 

근처에 살면서
듣고

 

수근댔을테니

 

그 입은 못 막지요

 

라울 힐버그
역사학자

 

이건 열차운행서 587호인데요

특별열차에 쓰인
전형적인 사례죠

여기 적힌 숫자들이
당시 수송인원을 보여줍니다

 

아래 문구는

 

'관계자 용'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이걸로 봐서
하급 수준의 기밀로 분류된 겁니다

 

그런데 이 문서가 결과적으로
죽음의 열차를 취급하면서도

어디에서도

이 문서뿐 아니라
다른 문서에서도

'비밀'이란 단어가
안 나옵니다

그 점이 놀랍습니다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게 놀라워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비밀'이란 단어를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꽤 심혈을 기울인 듯 합니다

여러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는 상황에서

실무에만 집중한 겁니다

이 과정에서
심리적으로 강조한 입장은

아무 군소리 없이

일을 실행하는 겁니다

아무 말 말아라
그냥 해라

부연하지 말아라

이런 식으로
이 '관계자 용' 문서는

수많은 담당자들에게

특별 하달 되었습니다

BFE
반푀르베 역에서부터

1, 2, 3, 4, 5, 6, 7, 8...
다음이 말키니아군요

트레블링카 바로
옆의 역이죠

하지만 총 8명의
담당자입니다

비교적 짧은 거리지만

라돔에서
바르샤바 구역까지 8명

기차가 역을
다 통과 하기 때문에

각 담당자들이
모두 알아야죠

 

그뿐만 아니라

문서가 1장이면 되는데
왜 2장일까요?

보면은 죽음의 열차인
'PKR' 이

예정대로
목적지로 향합니다

아울러 빈 열차가 트레블링카에서
떠납니다,원래 종착였이었어요

빈 열차는 원래
'L'로 표시 됩니다,'leer'

- 여기 '레어'라고 써있군요
- 네

이제
다시 돌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또 다른 기차가 오죠

보면 여기에

아주 묘합니다
체계적인 숫자에요

9228, 9229, 9230
9231, 9232

아무 특성이
없어 보입니다

마치 정규열차처럼

 

죽음의 열차

죽음의 열차

 

그리고 여기보면...

 

아마도 정리된
센지조프의 게토 사람들이

트레블링카로
가는 것일 겁니다

1942년 9월 30일에 떠나는데

16시 18분이 출발 시간이죠
예정표에

다음 날 오전 11시24분에
도착 합니다

 

또한 꼬리가 긴
열차입니다

서행한 것 같은데

여기 '50 G'로 나옵니다

화차 50량이란 뜻이고
사람을 만재했으니 중량이 상당했죠

이제 트레블링카에
사람들을 내려놓는데

숫자가 둘 나옵니다
11시 24분,오전이죠

그리고 15시59분
오후 4시쯤인데

그 동안에 사람들을
다 하차 시키고...

- 정리한 뒤 돌리는 거죠
- 아주 빠르군요

 

그 이전에 보면

같은 번호의 열차가

'빈 차'가
딴 곳으로 갑니다

오후 4시에 출발했고

또다른 작은 지역에서
희생자들을 싣습니다

이때가 3시죠...
새벽 3시

 

23일 오전 3시에
출발했군요

 

그리고 다음날
도착 합니다

 

분명히
같은 열차 같습니다

네, 같은 기차가
확실합니다

번호는 바꿔야겠죠
맞아요

그리고 다시
트레블링카로 돌아갑니다

매우 긴 여행이겠죠

트레블링카에 도착 한 뒤
또 딴 곳으로 갑니다

같은 방식
똑같은 운행

 

또 딴 곳

 

트레블링카 행

다음엔 챙스트호바
9월 29일

이게 한 사이클입니다

 

이게 열차운행서입니다

그 수를 합해보면...
'빈 차' 말고,사람이 탄 PKR의...

여기 있고
여기도...

 

- 2,3,4...
- 그런데 왜...

지금 1만명 가량의
유대인의 죽음을 이야기한 겁니다

이 열차운행서인가
뭔가를 갖고

- 그 이상일 수도 있겠군요
- 뭐 낮게 잡아서

그런데 왜 이런 문서들에
매료 되십니까?

저는 트레블링카에도 들렀고
이런 문서들은 부착적인 겁니다

제가 다루는 문서들은
특히 원본 문서들은

당시 관료들의 손을
실제 다 거친 것들입니다

이건 유물입니다

이게 남은 거고
별로 남은 게 없습니다

죽은 이들은
곁에 없습니다

 

트레블링카 역

 

제국철도(Reichsbahn)측은 이미
어떤 화물이든

비용만 내면 운반한다는
원칙이었습니다

 

따라서 기본 핵심은
요금의 조정이었어요

유대인을 트레블링카나

아우슈비츠나
그 어느 곳이든 운반하며

선로 킬로미터 당
화물요금을 적용했어요

주로 마일로
환산 했습니다

기본 요금은
전쟁 내내 일정 했습니다

 

10살 이하의 어린이는
반액이었고

4살 이하는
무료였습니다

지불 방식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경비하는 측에서
왕복요금까지 냈습니다

열차를 다시
되돌려야 했기 때문이죠

 

도중에 실례합니다만...

- 애들이 몰살 수용소로 가는데...
- 무료로요

가스실까지
무료로 할인 받았군요

네,수송도 무료고

여기 덧불여서...

요금을 지불한 대리인이
열차를 주문한 곳이

게쉬타포 아이히만의
부서였어요

자금 문제 때문에

그 부서가 나서서
요금 협상을 했는데

제국철도 측이
단체요금에 동의했어요

그래서 수용소로 수송되는
유대인들에게 단체 요율이 적용 됐어요

400명 단위로
단체 요율을 적용 한겁니다

400명이 하한선이었죠

400명에 좀 못 미치더라도
400명 분 요금을 냈죠

이럴 경우 성인들도
반값이었으니까요

이것이
기본 원칙이었습니다

물론 그 밖에
찻간이 지저분해진다거나

기물이 훼손된다거나

긴 여행 도중에

5-10%가 죽어나간
경우 등에는

별도 손해 비용이
청구 되었습니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비용이
지불되면 수송이 이뤄졌습니다

간혹 SS 측에서
신용거래도 했어요

가끔 지불 전에
수송이 이루어지기도 했고

왜냐하면 이 과정에서

일반의 다른
여행객들에게

요금 혜택을 주는

여행업체를
통했기 때문입니다

여행업체가 수송의
일부분을 관리했어요

지불 방법, 과정
표 구입 절차 등

좀 더 소규모의 경우는
SS 소속의...

일반 승객을 상대하는
여행사에서...

그래요
공인된 여행사들이죠

휴양지에
관광객을 보내듯이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냈어요

바로 동일 회사가
같은 과정으로

같은 절차를 밟고
똑같이 지불해서

- 차이가 없었군요?
- 전혀 차이가 없었어요

그런 일들을
하는 과정에서

그대로 평소처럼
처리했어요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는데도?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는데도

사실 복잡한
통화 절차까지도

다른 과정들처럼
손쉽게 처리했습니다

국경 통과는
요식 절차였죠

예를 들면요?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그리스입니다

그리스의 살로니카에서
이뤄진 수송은

1943년 봄에
46,000명의 희생자를 나은

원거리 여행이었어요

단체요금을 적용 하고서도
2백만 마르크가 청구 됐습니다

이때의 기본 원칙은...

수송 요금으로
통상적인 방식을 적용합니다

현재도 그래요
전세계적으로

본국의 화폐로
요금을 지불합니다

하지만

철도 편으로 가면서
그쪽 화폐로

환산해야 했어요

셀로니카는 그리스니까...

그리스는 드라크마...

그리스는 드라크마고
그 다음으로는...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노선

드디어 제국철도
구역에 와서는 마르크죠

 

한가지 역설적인 일은

당시 임무를 맡았던
셀로니카의 군 사령관이

이 모든 비용을
부담해야 했는데

마르크가 없었어요

조달도 못하고

하지만 드라크마는 있었어요

유대인들한테서
갈취한 자금이었는데

이럴 때
사용 되었어요

재정 문제가 생길 때

SS든 군이든
유대인 재산을 갈취해

은행에 특별 예치해
놓은 걸로

수송비를 지불했죠

유대인들이 자기들 죽음에
비용까지 댄 셈이군요

하지만 무엇보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몰살을 위한 예산이란 건
원래 없었어요

 

그래서 갈취한 재산으로
그 자금을 충당해야 했죠

좋습니다

셀로니카 유대인들의
재산을 갈취하긴 했지만

그래봐야
그리스 화폐였죠

제국철도 측에서는
당연히 마르크를 요구했고

어떻게 하면 드라크마를
마르크로 바꿀 수 있을까요?

환전을 해야 합니다

유럽 점령지역에서

물론 그러려면

점령지역에 누군가
마르크를 대량으로 가지고 있어야죠

하지만 어떻게요?

전시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죠

그래서 즉시

지불이 안됐지만

제국철도 측은 별도 보상 없이도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냈어요

 

필립 뮐러
'특무대원'들의 운명은

 

몰살시킬 수송인원의
수에 달린 셈이었습니다

 

수송인원이 많으면

 

대원들 수가 늘어납니다

 

대원들 없이는
일을 못하므로

 

솎아내지 않습니다

 

오슈비엥침(아우슈비츠)
현재의 역사

 

하지만
수송인원이 적어지면

 

우리한테도 여파가
미칩니다,즉각적으로

 

'특무대원'들은

 

열차가 줄어들면

 

우리가 청산되리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 필립 뮐러 -
대원들은 늘
위기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매일 수천 수만의

 

무고한 사람들이

 

굴뚝으로 사라지는 걸
보면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두 눈으로
실감 했습니다

 

그 사람들

 

남녀노소
그 무고한 사람들이

 

덧없이 사라지는데

 

세상은
말이 없습니다!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버려진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이럴 수록

 

생존의 절박성을
깨달았습니다

 

소중한 인명의 가치를

 

재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짐했습니다

 

살아있는 한
희망을 가져야 한다

 

이대로 희망을
저바려서는 안된다

 

그렇게 고난의 삶을
버텨 나갔습니다

 

하루가 가고,한 주가 가고
한 달이 가고

 

해가 흘러도

 

삶의 희망만 있으면
언젠가...

 

그 지옥을
벗어날 거라고

 

그 당시

 

1월과 2월

 

3월에는

 

열차가 거의
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트레블링카의 분위기가
가라앉았습니까?

 

유대인들이야
그렇지 않았겠지요

 

그걸 보면서
유대인들은 아주...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요
딴 이야기니까

 

네,알겠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작업대원들은
처음에는

 

살아남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1월에 들어
급식을

 

중단 시켰어요
비르트의 결정이었어요

 

인원 수가
너무 많다고

 

제1 수용소에만
5-600 명 됐으니까

 

저 위요?

 

 

반란을 막기 위해

 

총살이나
가스실은 안 썼지만

 

굶겼어요
그러자 전염병이 발생 했어요

 

발진티푸스 같은 것이

 

이제 유대인들은
안 믿게 됐어요

 

파리처럼 죽어 갔어요

 

곳곳에서

 

프란츠 슈호멜

 

우리 말을
안 믿었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요...
노상 하는

 

"살아 남을 거다!"
우리도 깜빡 믿었으니까

 

자기 거짓말에
자기가 속아넘어 갔어요

 

 

하지만 이러더군요

 

"아니요
우린 산송장일뿐이에요"

 

'죽음의 시기'라는 게

 

1943년 2월
시작 됐습니다

 

그로드노와 비야리스토크에서
대량 수송이 있은 뒤입니다

 

아주 잠잠했습니다

 

1월 말에서
2,3월까지

 

일도 없고
수송도 없고

 

수용소가
텅 비었고

 

돌연 모두가
굶주리게 됐습니다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기근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어느 날

 

쿠르트 프란츠
수용소장이

 

우리 앞에 나타나

 

말했습니다

 

"기차가 내일부터
다시 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아무 말 않고

 

서로 얼굴만
쳐다봤습니다

 

아마 저마다 속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내일이면

 

굶주림이 끝난다"

 

그 시기에

 

우리는 마음 먹고
반란을 계획 했습니다

 

그 때까지는
살아 남았으면 했습니다

 

살로니카 집단수용소에서
수송객들이 왔습니다

 

불가리아와 마케도니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부유층이었고
객차칸에 짐을 가득 실었습니다

 

그 때
동료들이나 저나

 

절박한 심정에
휩싸인 나머지

 

아주 낯뜨거운
짓을 했습니다

 

먹을 것에
눈이 뒤집혔습니다

 

크랙커나 잼이 든

 

상자들을

 

나르면서

 

일부러
짐을 떨어뜨리곤

 

허겁지겁 달려들어

 

크랙커와 잼을
입 안에

 

쑤셔 넣었습니다

 

그 발칸 수송객들 때문에

 

섬찟하게 깨달았습니다

 

리하르트 글라자르

 

우리는 트레블링카 공장의
노동자며

 

전체 제조 공정이

 

우리 목숨을 좌우한다

 

즉 그 트레블링카의
살륙 공정이

 

새로온 사람들 때문에

 

갑자기 깨달았습니까?

 

뭐 갑작스런 일은
아니었지만

 

그 발칸 사람들을
보고서야

 

더 극명해지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겁니다

 

왜냐구요?

 

2만 4천명

 

언뜻 봐서는
병약한 사람이라곤 없고

 

모두 원기왕성 했습니다

 

그때 막사에서
그 사람들이 벌써

 

짐 사이로 벌거벗은
광경을 지켜봤는데

 

다비드 게자크
아니 다비드 브라트가 그랬습니다

 

"마카베아야

 

마카베아들이
트레블링카에 왔어!"

 

남들보다 건장하고

 

강인한 사람들

 

전사들!

 

네,과거의 전사들입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이 건장한 신체의
남녀들이

 

닥칠 일을
전혀 모르고 있다

 

눈꼽만치도

 

곧 일은 원활하고

 

신속하게 진행 되었습니다
어느 때보다

 

우리는 수치스러웠고
또한

 

이렇게 느꼈습니다
우리가 하려던 일은

 

몇 사람만으론 안되고

 

전체가 동참해야 한다

 

그 생각은 이미 1942년 12월쯤
무르익은 단계였습니다

 

42년 12월 초에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는 말하자면...

 

'열외'였습니다

 

지내면서 안 겁니다

 

수용소장 스탕글은

 

효율성을 위해
우리들의 힘을 빌렸습니다

 

여러 방면에서
숙련 시킨 일꾼들

 

분류가들
시신 운반자들

 

여자들 머리를 깎는
이발사들 등등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나중에

 

봉기의

 

기회를 엿보게 됐습니다

 

우리는 1943년 1월에

 

거사할
계획을 짰습니다

 

암호명은 '시간'이었고

 

그 때가 되면

 

사방에서
SS들을 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소장실로 쳐들어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무산 됐습니다

 

바로 수용소가
잠잠해지면서

 

이미 발진티푸스가
돌았기 때문입니다

 

1943년 가을

 

이제는 분명해졌습니다

 

우리가 나서지 않는데

 

누가 우리를 돕겠느냐

 

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우리 '특무대'
인원 만으로

 

이 몰살의 흐름을 끊고

 

우리 목숨도
구할 수 있겠는가

 

방법은
한가지뿐이었습니다

 

무장 봉기를
일으키는 것

 

생각은 이랬습니다

 

무기 몇 정이라도
손에 넣고

 

작업반원들을
동참시켜

 

전 수용소 인원이

 

들고 일어나면
기회가 있을 지 모른다

 

이게 요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연락책을 두고

 

끌려온 레지스탕스
활동가들과 접촉 했습니다

 

먼저 비르케나우에서

 

다음엔
제1 아우슈비츠에서

 

사방에서 일제히
봉기할 수 있도록

 

필립 뮐러

 

레지스탕스 측에서
답변이 왔습니다

 

제1 아우슈비츠에서는
우리 계획에

 

동의하고
동참한다고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레지스탕스 활동가들 중에

 

유대인들은
극소수였습니다

 

대개가 정치범들로

 

당장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하루 하루
버티다 보면

 

살아날 가망이 있는

 

처지였습니다

 

우리 '특무대원'들과는
사정이 달랐습니다,완전히!

 

루돌프 브르바

아이슈비츠와 비르케나우는

대량학살을 위한

처형장이면서

또한 통상적인
강제수용소이기도 했습니다

 

독일 영토 내의

마우트하우젠,부헨발트

다하우,작센하우젠처럼

 

하지만 마우트하우젠의
주 생산품이 채석장의

강제노역을 통한
대형 석재였던 반면에

아이슈비츠의 생산품은
죽음이었죠

모든 게 죄악이었습니다

화장장을 돌리면서

 

그게 목적이었어요

수용자들은
화장장으로 걸어갔고

화장장을 지었죠

 

수용자들이 기거하는
막사도 지었고

물론 이와는 별도로

독일의 일반 강제수용소와 같은
요소도 있었죠

크룹과 지멘스의
공장이 들어와

노역을 시켰으니까

크룹과 지멘스의 공장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바로 근처에 지어졌죠

 

'아우슈비츠 제 1 수용소'

 

전통적인 강제수용소에는

정치범들이
주로 많았어요

 

노동조합원들
사회민주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전 스페인 내전 투사들

 

상황은 독특하게
전개 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 안의
레지스탕스 주도권은

독일어권의
반나치 세력이 쥐고 있었어요

 

독일 태생으로

 

나치 체제에서
'순수 인종'으로 간주 되었고

 

수용소의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나은 대우를 받았죠

물론 귀빈 대접을
받은 건 아니지만

 

하지만
애초부터 이들은

나치의 SS 고관들처럼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어요

 

어떤 식이었느냐 하면

 

수용소 내의 체계적인
생활 조건 개선에 중점을 뒀죠

 

1943년
아니 42년

 

비르케나우에서

12월과 1월에

 

하루 평균 400명의
포로들이 사망했어요

 

그런데 1943년 5월 경에는

날씨가 풀리기도 했지만

레지스탕스 세력의
이런 활동으로

 

사정이 상당히 개선되어

수용소 내의 사망율이
현저히 감소 했습니다

 

그쪽 입장에서는
상당한 소득을 거둔 거죠

 

이런 강제수용소 내의

 

생활 조건 개선은

 

SS 고위층의 정책과
그다지 배치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수용소의 원래 목적에
간섭하지 않는 한

 

즉 죽음의 생산이죠

수용소에 닿는대로
즉시 실행해야 하는

 

당시의 수용소가

사람들을 수송해
노동력을 활용하려고 했다면

신체 조건이
좋은 사람들

너무 늙지도 않고
너무 젊지도 않고

어린 아이나
임산부도 아니고 등등

건강체에다

수용소에서 죽은 사람들을
대체할만한 사람들을 골랐겠죠

새로운 일꾼들을

 

다음 이야기는
어디서 얼핏 엿들은 건데

수송이
처음 시작된 곳이

네덜란드나 벨기에라던가
확실한 건 아니고

SS 의사가

유대인들 중에서도
번듯한 사람들만을 골랐답니다

가스실로
수송할 인원을요

가스실에 보낼

하지만 SS 수용소 대표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어요

 

우연히 듣게 된
대화 중에서

의사가 그랬어요
"왜 안 받는냐

 

네덜란드 치즈를
먹어 건장한 유대인들인데

수용소에서
잘 써먹을 거다"

그러자 그 SS 하사관이
대꾸했어요

 

"안 그래도 요즘은

수용소 놈들이
목도 안 매단다"

- 빨리 안 죽어 나간다는 거구요?
- 그렇죠

이런 거죠,수용소의
수용능력이 평균 3만인데

 

그 중 5백
아니 5천명이 죽으면

새로 수송되는
유대인으로 채우면 되는데

하지만
1천명만 죽으면

 

1천명 외에 나머지는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야겠죠

 

강제수용소 내의
생활 조건 개선이

 

가스실의 사망율을
높이는 결과가 됐습니다

수용소 내 전체 인원의
사망율은 낮추면서

이렇듯이 수용소의
생활 상태는 나아졌지만

대량 처형을 줄이는 데는
전혀 기여를 못했습니다

 

수용소로 수송된
사람들의 죽음에

제 견해로 강제수용소에서의
레지스탕스 활동은

레지스탕스들이 내세운

수용소에서의
생활 조건 개선이란

단지 첫 단계일 뿐이었습니다

레지스탕스 활동의
실제 궁극적인 목적은

대량 처단 절차를
막는 것이었습니다

조직적인 살륙을

그래서 할 일은

힘을 키우면서
시간을 준비했어요

내부에서 SS를
공격할 시기를

그것이 비록
자살행위일찌라도

체제를 뒤집는 거니까

이런 면에서
제 생각으로는

적절한 목표였고

가치있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이뤄질 목표는 아니었죠

준비할 것도 많고
시기도 적절해야 하며

조직적으로
저항 활동을 펼쳐야죠

판단을 못 내리겠더군요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했어요

레지스탕스의 최종 목적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강제수용소 가운데

아우슈비츠의 목적과

마우트하우젠이나 다하오의
목적은 달랐다는 겁니다

마우트하우젠과 다하오에서는

이런 방식의
저항 활동이

정치범들의 생존률을
높여 주었고

아울러 이런
숭고한 방침이

강제 수용소 안에서
나치들이 자행했던

조직적인 대량 학살 행위를
개선시키는 계기가 됐습니다